역사

영조 가계도와 업적/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공룡 선생님 2022. 11. 1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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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야기는 영화 [사도세자]로도 제작이 된 적 있는데요. 이 글에서는 영조 가계도와 영조 업적,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조 어진
영조 어진

영조 가계도

1694년 10월 31일 숙종과 숙빈 최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최 씨는 인현왕후를 모시던 몸종 무수리 출신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 출신에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합니다.

 

조선 21대 왕이 되며, 왕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왕위에 오릅니다.(숙종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릅니다.) 52년간 왕으로 집권했으며 이는 조선 최대 장기 집권 기간이고, 조선 왕들 중 가장 장수(81세)한 군주입니다.

 

  • 정비-정성왕후 서 씨 : 재위 기간이 33년으로 역대 가장 오래 재위한 왕비였습니다.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결혼 첫날 영조에게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영조가 '손이 참 곱다.'라고 얘기하니,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답하는데 이것이 영조를 자극합니다. 영조의 친모 숙빈 최 씨가 무수리 출신이어서 고생하였기에 손이 많이 거칠었는데 이 말이 자신의 친모를 모욕한 말로 오인한 것이죠. 그녀는 자녀를 낳지 못했고, 후궁 영빈 이 씨의 아들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아서 친자식처럼 돌보았다고 합니다.

 

  • 계비-정순왕후 김 씨 : 정성왕후 승하 후 후궁들 중에 정비를 고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중전을 간택합니다. 15세 어린 나이에 51세 연상인 66세 영조와 결혼합니다. 의붓아들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어렸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도 7살 차이밖에 나지를 않았습니다. 역대 왕비들 중 국왕과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은 왕비입니다. 슬하에 자녀는 없습니다.

 

  • 제1후궁-온희정 빈 이 씨-1남 2녀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 효장세자가 9살에 요절하였으나 사도세자의 친아들 정조가 효장세자 사후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면서 추존됩니다.

 

  • 제2후궁-소유 영빈 이 씨-1남 6녀(사도세자 외 6 왕녀)  
  • 제3후궁-귀인 조 씨 -2녀
  • 제4후궁-숙의 문 씨-2녀

 

영조 가계도
정성왕후 서 씨  자녀 없음
정순왕후 김 씨 자녀 없음
온희정빈 이 씨 1남 2녀 (효장세자-훗날 정조가 양자가 됨)
소유영빈 이 씨 1남 6녀 (사도세자)
귀인 조 씨 2녀
숙의 문 씨 2녀

영조 업적

영조 업적을 6가지로 간단 정리했습니다.

 

  1. 탕평 정책
    당색이 옅은 중도파인 탕평파를 등용하여 붕당의 대립을 약화합니다.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를 건립하고 탕평 교서를 발표하는 등 국왕 권력 강화를 위해 힘씁니다. 붕당의 근거지라 불리던 서원을 정리합니다.
  2. 균역법 실시
    농민의 군포 부담을 2 필에서 1 필로 감소시킵니다.
  3. 신문고 부활
    악형을 폐지하고 삼심제를 시행합니다.
  4. 통청윤음 발표
    서얼, 중인이 중요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5. 수성윤음 발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도성을 방위하는 체제를 확립합니다.
  6. 편찬 산업
    동국 문헌 비고, 속대전, 속 오례의 등을 편찬합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사도세자 상상 어진
사도세자 상상 어진

정조의 친부인 사도세자. 영조와의 긴 갈등 끝에 27세 7월 한여름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게 됩니다. 이는 임오년에 일어나는데 임오년에 화를 당했다 하여 '임오화변'이라 불립니다.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던 효장세자가 죽고, 영조에게는 오랜 시간 아들이 없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 나이 43세 얻은 귀한 아들이었는데요. 영빈 이 씨에게서 출생하였지만 출생 다음 해 정비 정성왕후 서 씨의 양자로 입적됩니다.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총명했다고 합니다. 태어난 지 4달 만에 기어 다니고, 6달 만에 대답도 곧잘 했다고 합니다. 2살에는 천자문도 배워 60자를 써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지금으로 따지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정서적으로 학대한 아버지로 보입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된 아기인 사도세자를 친모 영빈 이 씨와 떨어트리고 선의왕후 어 씨가 살던 저승전에 머물며 궁녀들이 돌보게 합니다. 또한 겨우 4살 무렵부터 구박하고 혼내었고, 10살부터는 엄한 질책을 사도세자에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성향도 많이 달랐습니다. 영조는 꼼꼼하고 치밀한 문인쪽이었지만 사도세자는 기질적으로 무인 기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영조는 영빈 이 씨가 낳은 딸 화평옹주를 많이 아꼈습니다. 화평 옹주는 자신의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아버지 영조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잘해주었으나 어린 나이에 죽게 됩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고, 같은 해 인원왕후까지 사망하며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중간 역할의 인물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왕위를 물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대리청정을 시키며  많은 신하들 앞에서 화내고 망신을 주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어린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학대로 인하여 정신병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세자는 강박 장애인 의대증(불안을 없애기 위해 어떤 행동을 반복)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의복 하나를 입는데도 옷 20-30벌은 지어 올려야 했다고 합니다. 또한 나인들을 살해하고, 겁탈하거나 폭행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영조는 정신병자가 된 사도세자가 아니라 손자인 훗날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합니다.

 

손자가 왕이 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소용없게 되자 결국 뒤주에 가두게 됩니다. 이 때 친모인 영빈 이 씨를 불러 의견을 묻는데요. 슬프게도 영빈 이 씨는 손자를 생각하여 영조의 말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것에 동의합니다.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이것을 지켜봤기에 죽을 때까지 자신의 할머니를 용서하기 힘들어했다고 하죠.

 

지금까지 영조 가계도와 영조 업적,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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