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토, 일 오후 9시 25분에 32부작 고려 거란 전쟁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데요. 이글에서는 고려 거란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던 강감찬 장군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인정받는 강감찬.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에서 최수종 님이 연기하는 강감찬 일생을 요약하고, 그 업적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강감찬 일생
- 948년 12월 27일 금주(지금의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 983년 문과에 장원급제합니다. 이때 나이는 36세로 늦은 편이었습니다.
- 1009년(목종 말년) 예부시랑(고려시대 문관의 인사와 훈봉 등 사무를 담당한 중앙관청 예부의 정4품관직)이 되었습니다.
- 강감찬은 정식 무관으로 임명된 적이 없습니다. 30년 넘게 문관으로 봉직하였고 전쟁에 나간 것은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 1010년 현종 1년,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두 번째로 침입합니다. 이때 강감찬은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을 주장합니다. 다행히 양규가 거란을 크게 물리칩니다.
- 1018년 현종 9년, 또다시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고 이때 강감찬이 나섭니다.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흥화진과 귀주에서 거란을 크게 이기고 승리합니다.
- 1031년 9월 15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려 거란 전쟁
고려 시대 초기, 거란은 고려를 3번 침입합니다.
- 고려 거란 전쟁- 제1차(993, 성종) : 고려는 친송 정책과 북진 정책을 펼칩니다.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에 침입하여 송과의 단교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요구합니다. 이때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여 국경선이 오히려 확장됩니다. 고려는 거란의 요구대로 송과의 외교 단절과 거란과 사대관계의 수교를 약속하지만 지키지 않았습니다.
- 고려 거란 전쟁-제2차(1010, 현종) : 고려가 약속과 다르게 송과의 교류를 유지하자 강조의 정변(거란에 보고하지 않고,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을 구실로 거란이 다시 침입합니다.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고,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양규의 활약으로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의 퇴로를 차단합니다. 현종의 입조(하국의 왕이 상국에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를 조건으로 거란이 철수하게 되지만 지켜지지 않아 제3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합니다.
- 고려 거란 전쟁-제3차(1018, 현종) : 현종의 입조(문안인사) 약속 불이행을 빌미로 다시 쳐들어옵니다. 거란의 소배압이 고려에 침입하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물리칩니다.
고려 거란 전쟁- 귀주대첩 강감찬 요약
고려 | 거란 | |
지휘관 | 강감찬, 강민첨, 김종현 | 소배압, 아과달, 작고, 고청명 |
병력 | 20만 8천여 명 | 10만여 명 |
피해규모 | 모름 | 거의 전멸 |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개경으로 계속 진군하여 나갑니다.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였고, 대장군 강민첨을 원수로 병마판관에 김종현을 임명하게 됩니다.
고려군의 강민첨이 자주(지금의 자산군)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합니다.
또한 시랑 조원은 예성강 상류지역에서 1만여 명을 사살합니다.
하지만 소배압은 현종 10년 다시 개경을 향해 진군합니다.
강감찬은 미리 병마판관인 김종현에게 군대 1만여 명을 주어 개경을 방어하고, 거란군이 개경에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개경 근처에 있는 작물을 미리 거두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킵니다.
드디어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합니다.
이미 지친 거란군들은 개경에 먹을 작물이 없자 소배압은 퇴각 명령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강감찬은 이렇게 퇴각하는 거란군들을 노립니다.
거란군들이 퇴각하는 길 곳곳에 숨어 있다가 급습하였고, 마침내 귀주에서 거란과 고려는 대치하게 됩니다.
귀주는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 위치한 곳으로 강동 6주 중 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고려 거란 전쟁의 팽팽한 승부가 시작됩니다.
김종현의 부대가 귀주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마침 비바람 또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뀝니다. 거란군은 급하게 북으로 도망칩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을 추격합니다. 그리하여 적들의 시체가 널리게 됩니다. 살아 돌아간 적의 수는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하게 됩니다.
고려군에게 참혹하게 패배한 거란.
그들의 수장이었던 소배압은 간신히 살아 거란에 돌아갑니다.
하지만 거란 왕 성종은 그에게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들어갔다가 패배하여 돌아와 무슨 낯으로 얼굴을 드냐며 얼굴의 가죽을 벗긴 후 죽이겠다는 말을 하며 그를 관직에서 쫓아냅니다.
강감찬 귀주대첩 승리는 대외적으로 큰 위상을 인정받습니다. 그리하여 내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해 보 수 있게 되었고, 고려 부흥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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